목록남국 (66)
력사를 찾아서
■김씨끼리 죽고죽인 왕위쟁탈전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실 신라, 특히 하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복잡함에 포기하고픈 생각이 절로 든다. 부계, 모계, 비계가 모두 근친혼으로 맺어졌고, 게다가 형제간, 사촌간, 혹은 소수의 진골귀족이 뒤엉켜 죽고 죽이는 왕권다툼을 벌였으니 말이다. 촌수를 가늠하기도, 누가 누구의 편인지, 적인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36대 혜공왕(765~780)이 살해되고 선덕왕(780~785)이 즉위할 때부터 46대 문성왕(839~857)까지 60여 년 동안 무려 11명의 왕이 교체됐다. 그 중심에 원성왕(785~798)이 있었다. 원성왕(김경신)은 경쟁자인 무열왕계의 김주원(생몰년 미상)을 몰아내고 즉위했다. 이로써 원성왕계 왕통이 성립됐다. 이쯤에서 왕실 계보도를 참..
흔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는 그저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25년째 대한제국 역사를 연구 중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건 철저히 일제 식민사학의 관점이다. 우리도 모르게 거기에 젖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대한제국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근대국가 정신 이어졌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를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 알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지적했다. [박종근 기자] 120년 전 오늘이었다(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근대국가의 시발점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국가(國家)’라는 말보다 ‘민국(民國)’이란 용어를 더 즐겨 쓰던 군주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종이 나라를 지칭하며 ‘국가’ 대신 ..
여진정벌 큰 공 세우고 벌 받은 윤관김삼웅2024. 2. 27. 08:12 [겨레의 인물 100선 100] 국토를 지키고 강역을 확장한 고려의 명장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김삼웅 기자] ▲ 윤관장군 묘 웅장한 왕실의 무덤 같다ⓒ 김수종 윤관(尹瓘)은 우리 역사상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만큼 국토를 지키고 강역을 확장한 고려의 명장이다.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1)임기환2021. 12. 9. 15:33 [고구려사 명장면-137] 한반도에서 한성고구려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부흥세력은 670~673년 4년 동안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끝내는 평양 이남의 세력 기반을 모두 상실하고 임진강을 건너 신라로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임진강을 당군 남하의 최후 저지선으로 설정하고,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을 영유하려는 애초의 목표를 포기함으로써 당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신라의 전략 변화가 배경이 되었다.이렇듯 고구려 부흥운동은 결국 신라와 당 사이 전쟁에서 종속적인 변수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당전쟁의 결과가 결국 보덕국 고구려유민들의 존재 방식까지 규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부흥운동을 좌절케 한..
■ 1차 고려 - 거란전쟁(993년) ■ 2차 고려 - 거란전쟁(1010년) 구글어스로 추정해본 흥화진(평북 피현군 당후리)의 위치. 130~170m 고지군을 따라 능선상에 축조된 성이다. 넓은 개활지와 삼교천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유리한 장점을 갖고 있다. ‘걸망성’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데, ‘이 성에서 거란군이 망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양규)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사극 을 계기로 새삼 부각되는 역사적인 인물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고려판 세종대왕’으로 통하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이죠.1254년 몽골의 잇따른 침략에 시달리던 고종(재위 1213~1259)은 ‘국난 극..
후삼국 시대의 도래와 동아시아의 대분열 통일 신라는 9세기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탈전과 경제 실패, 지방 호족들의 반란 등으로 이미 붕괴 중이었다. 마침내 900년에 경상도 산골 출신인 견훤이 후백제를 선포했고, 901년에는 신라의 왕족이며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렇게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고, 통일전쟁이 전 국토를 황폐하게 했다. 전쟁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국가 구조와 지역 갈등을 확대 재생산했다는 퇴행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왕족과 수도 중심의 질서를 벗어나 호족과 지방의 성장, 신불교의 등장이라는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측면도 있다. 국제 환경은 왕건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후삼국이라는 분열 시대에 중국 지역과 북방 지역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있었다면 대규모 침공이나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