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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 [강동 6주를 찾아서 ①] 압록강 남쪽인데 강동 6주? 고려 북계의 서북쪽 국경은 요령성 요양, 심양 인근조하준 기자 입력 2023.12.08 13:23 수정 2023.12.10 10:19 고려 북계는 요양, 심양과 접경하고 있었다 『명사』 권 41 지리지 2에 철령위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그 기록을 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철령위는 홍무(洪武) 21년(1388년) 3월에 옛 철령성에 설치했으나 26년(1393년) 4월에 옛 은주(嚚州)의 땅으로 옮겼다. 곧 지금의 치소이다. 서쪽에는 요하가 있으며 남쪽으로 범하(泛河)가 있고 또 남쪽에 소청하(小清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 들어간다. 또 남쪽에 의로성(懿路城)이 있는데 홍무 29년에 의로천호(懿路千戶)를 이곳에 두었다. 또 범하성(范河城)이 위..

고려 시대의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고려의 개혁을 위해 몸부림쳤던 한 왕이 있었다. 그 왕은 바로 고려의 제 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지속된 원(元)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自主性)을 되찾고자 노력했고,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지만) '신돈'(辛旽)이라는 인물을 중용해 정치, 사회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급진적인 개혁 노선을 펼치고자 했다. ■ [역사줌인] 고려의 마지막 개혁혼이 꺼지다 '공민왕 피살'최경식2021. 7. 10. 03:39 고려의 마지막 개혁 군주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좌절 고려 제 31대 왕 '공민왕'과 부인 '노국대장공주'. 국립고궁박물관 그러나 기성 세력들의 극심한 반발과 사랑하는 부인의 죽음, 대내외적인 반란 및 침입 등으로 결국..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2월 유럽 주재 공관들에 훈령을 내린 사실이 2008년 2월 22일 밝혀졌습니다. 고종, 1905년 유럽 공관에 훈령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사진)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2월 유럽 주재 공관들에 훈령을 내린 사실이 22일 밝혀졌다. 고종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본지 2월 20일자 1면) ▶서구 열강의 정상에게 보낸 국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 밀사 파견에 앞서, 공식 외교 채널을 통해 입체적인 총력 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특히 고종은 이 훈령을 통해 주재국 정부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한편 전면 문호개방..

2012년 2월 22일 문화재청(청장 김 찬)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된 '사직단'(社稷壇:사적 제121호)의 원형복원을 위해 우선적으로 정비할 수 있는 시설물에 대해 자체적인 정비에 들어갔다고 밝혔습니다. 그 동안 서울특별시 종로구가 관리하던 사직단을 올해부터 문화재청이 이관 받아 현황 실태조사를 시행하고 원형복원을 위해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올 2월 말부터 자체 직영사업단을 투입, 주원(周垣:유원 주변을 다시 둘러싸고 있는 담)권역 양식에 맞지 않는 수목과 가로등 제거, 동파된 전(塼)돌 교체, 안향청 번와 보수, 덧달아낸 후면 창고 철거 등의 정비사업을 우선 시행하게 된다. 아울러 신성시 돼 있는 유원(壝垣:사단 등 제단을 둘러싸고 있는 담)과 주원 권역 안의..

거대한 전쟁 속에서 몽골에 고려는 금나라와 송나라의 배후세력이라는 지정학적 가치가 있을 뿐 군사전략상으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몽골 군대가 고려와 벌인 아홉 번의 전투는 정부 없는 나라를 약탈하는 수준이지, 본격적인 전쟁은 아니었다. 더구나 몽골은 1259년 몽케 대칸이 남송을 원정하는 도중에 죽자 내분과 혼란에 빠졌다. 결국 동생인 쿠빌라이 칸이 뒤를 잇고, 1271년 국호를 원으로 개칭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쿠빌라이의 편을 들어 외교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본다. 그 결과 유리한 조건으로 1270년 개경으로 돌아가고 항복해 쿠빌라이의 부마국이 됐다. 군사력을 갖추고, 국제질서의 상황을 간파해가면서 유연성과 배짱을 겸한 고려 무신정권의 외교 전략은 현실감이 부족한 지금의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조선의 강역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공험진부터 철령이 북계였습니다. 고려, 조선 및 중국 사료들이 말하는 고려의 북방강역. 지금의 요령성 진상둔진이 옛 철령이고, 흑룡강성 영안현이 공험진이다. 이케우치 히로시가 함경남도로 끌어내린 북방 강역을 100년째 추종하는 것이 이 나라의 부끄러운 현실이다.(출처;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 서울신문 (seoul.co.kr)) 태종은 재위 4년(1404) 5월 19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과 왕가인(王可仁)을 명나라 수도 남경에 보내 두 나라 사이의 공식적인 국경선 획정을 다시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명 태조 주원장이 “철령 때문에 왕국(고려)에서 말이 있다”면서 철령~공험진까..

광무개혁(光武改革)은 1897년부터 1904년까지 고종이 시행한 개혁을 말한다. 광무개혁은 대한제국을 서구화하고 근대하기 위한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대한제국은 산업 혁명의 후발주자로 참여하였다. 대한제국이 1897년 최초로 반포한 무게 및 측량에 관한 법에 따라 당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무게와 측량의 기준이 하나로 표준화되었다.[8] 같은 해 대한제국 정부는 지적조사를 개시하여 소유지 체계를 서구식으로 근대화하고자 했다. 이 개혁은 토지세 개혁과 연관이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화폐 제도의 개혁을 담당했던 이용익이 토지세 개혁을 맡았다. 지적조사를 실시한 이후 토지를 정확하게 측정한 지계가 발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토지 개혁은 러일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대한제국 정부는 도시의 산업기반시설도 갖추기 위해..

■ 만민공동회 관리(官)와 백성(民)이 머리를 맞대고 국가의 장래와 개혁의 방향을 논의한 것은 조선이 건국된 지 5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대신들과 시민들은 관민공동회에서 국정개혁안 '헌의6조'를 의결했습니다. 서희경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한국 역사상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의 이행의 역사는 1989년 만민공동회(관민공동회)로부터 시작된다면서 "이를 통해 백성이 비로소 정치적 주체로 떠오르고 자각되었으며 근대적 정치 주체인 '국민'이 탄생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관민공동회에서 의결된 '헌의6조'가 한국 근대 헌법의 뿌리가 됐다고 주장했습니다. 1898년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조선인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 일본 고지도 약 200점 확인손대성2021. 2. 19. 15:29독도재단 고지도 조사 결과 발표.."영유권 문제 중요 증거 자료"대한민국 국경선 안쪽에 독도가 그려진 일로청한명세신도(1903) [독도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포항=연합뉴스) 손대성 기자 = 일본 스스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인정하는 일본 고지도 약 200점이 확인됐다.경북도 출연기관인 독도재단은 지난해 동북아역사재단,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박물관, 국회도서관, 국립해양박물관, 독도박물관 등 독도 유관기관, 대학 부설 연구소가 소장한 고지도 약 1천점을 조사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19일 밝혔다.약 1천점 가운데 독도가 섬 형태로 나타난 지도는 약 400점이다. 독도재단은 일부 일본이 조작한 지도를 제..

[ 간도 영유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통일을 위한 숙제 간도 수복론 vs 회의론 국론 통일해야통일대박론과 간도기자명강정민 변호사·‘독도반환청구소송’ 저자 입력 2014.06.15 16:56호수 2311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5년 국회에서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라는 제목의 간도자료집이 발간되었다.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는 1867년부터 1945년 사이에 작성된 일제의 기밀문서 가운데 간도영유권 관련 문서들의 번역본과 영인본을 수록한 자료집이다. 자료집 뒤에는 분량 때문에 미처 싣지 못한 기밀문서 목록이 첨부되어 있고 ‘일본 외무성 및 육해군성 문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에는 일제강점기 간도 관련 핵심 자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면 민간은 정부가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