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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2019년부터 진행한 광화문광장 조성 과정에서 조선시대 주요 관청의 흔적이 발굴됐습니다. 지금의 광화문광장에서 세종대로 일대까지 뻗어있었던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서울의 핵심거리로 최고 행정기구인 의정부를 비롯한 6조(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가 있었습니다. 삼군부(지금의 합동참모본부)의 외행랑, 배수로, 건물지의 터가 확인됐고요, 중추부의 건물자리, 사헌부(지금의 감사원, 검찰)와 병조의 문지, 행랑, 담장, 우물, 배수로 터, 형조와 공조의 배수로 터, 그리고 민가 터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공사에서 드러난 조선시대 육조거리.①지점에선 삼군부의 외행랑, 배수로, 건물지의 터가 확인됐다.②지점에서는 중추부의 건물 자리가,③지점에선 사헌부와 병조의 문지·행랑·담장·우물..

2003년 12월말 문화운동가 황평우씨가 종로구 청진동에서 건설사(르메이에르건설)가 주상복합건물 사업시행을 위해 낡은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고 있는 현장에서 건물 기초석인 장대석(長臺石·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은 돌)을 발견하고 문화재청에 ‘문화재를 발견했다’고 신고하여, 한국건축문화연구소(명지대 부설)가 본격 발굴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울=연합뉴스) 서울 도심 종로 한복판인 '서울 종로 청진2-3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바닥을 드러낸 조선시대 시전행랑(아래쪽). 조사 결과 시전행랑 뒤 피맛길에서 청진동으로 통하는 쪽에서는 이문(里門)이라는 조선시대 문터가 드러나기도 했다. 오른쪽 사람의 왼쪽에 노출된 초석 4개가 이문의 흔적이다. 2010.6.20 > ..

2021년 6월 29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의 허가를 받아 (재)수도문물연구원(원장 오경택)이 발굴조사 중인 ‘서울 공평구역 제15ㆍ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나 지역, 발굴현장: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79번지)’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에 제작된 금속활자 1,600여 점과 ▲세종~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의 주전(籌箭)을 비롯해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점, ▲중종~선조 때 만들어진 총통(銃筒)류 8점, 동종(銅鐘) 1점 등의 금속 유물이 한꺼번에 같이 묻혀있는 형태로 발굴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훈민정음' 금속활자 등 중요 유물 쏟아진 피맛골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인사동 ..

2023년 3월 20일 문화재청과 수도문물연구원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일대 도시형 생활주택을 짓는 부지에서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들과 관련 유물이 확인됐습니다. 문화재청은 지난 9일 열린 학술자문회의에서 조사 지역이 고려 남경 궁궐 중심지와 고려 현종계 왕실 성지인 삼각산 승가사의 중간지점이고 건물지 축대와 기단 등이 정연하게 조성되고 보존상태 양호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승안 3년'(承安 三年, 승안 3년은 1198년으로 추정)이란 글이 새긴 기와 조각을 비롯해 청자 조각, 도기 등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문화재청은 '승안 3년'이 새겨진 이곳에 고려시대에 조성된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종로 신영동서 고려시대 추정 건물터 발견이수지 ..

개성 만월대는 약 1100년 전 세워진 고려태조 왕건의 궁궐터입니다. 이형구교수는 회경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북쪽에 궁전의 중심 건물인 회경전이 한 단 높은 지대석 위에 웅장하게 솟아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회경전 뒤에는 장화전·원덕전·건덕전·중광전·선정전 등 여러 궁전 건물의 초석이 연달아 자리 잡고 있으며, 궁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수많은 건물들 가운데서 회경전이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려 통일의 터전 - 만월대 개성 남대문을 끼고 시내를 지나 만월대(滿月臺)로 향하였다. 영통사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개성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특별히 만월대 방문을 요청한 뜻은 고려 통일 왕조를 500년 동안 지켜온 왕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개성 남대문개성..

‘친일파’ 영국기자도 치를 떤 일제 만행…역사적인 의병사진 남겼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이기환 기자2024. 9. 5. 05:00 유인석·이강년·허위·최익현·연기우·윤인순·허겸·노재훈…. 얼마 전 구한말 항일 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대표 의병장 및 독립투사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국가유산청이 일본에서 구입 환수한 자료는 항일 의병장 및 독립운동가가 작성한 친필 편지 등 13건 등이다. 일제 헌병 경찰이었던 아쿠타가와 나가하루(芥川長治)가 1939년 두루마리 형태로 묶어 보관한 문서들이다. 1907년 영국 데일리 메일 특파원인 프레더릭 아서 매킨지가 의병 항쟁의 현장인 경기 양평 등에서 찍은 의병 사진 두 장. 매킨지는 군대 해산 직후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항일 의..

다음백과에 따르면 신라는 648년(진덕여왕 2년)에 당과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뒤 패강(대동강)을 경계선으로 한반도를 당과 신라가 나누어 통치한다는 비밀협약 - 나당동맹을 맺었다고 합니다. 7세기에 접어들면서 삼국은 치열한 전쟁을 전개했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연결하여 신라를 협공하는 형세였고,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의 배후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신라와의 연대를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신라는 고구려·백제가 침입할 때마다 당에 구원 사절을 파견했고, 당나라는 신라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입장에서 고구려·백제에 대해 외교공세를 강화하기도 했다. 648년(진덕여왕 2) 두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군사적 결탁을 한층 더 공고히 하고, 두 나..

통일 신라는 9세기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탈전과 경제실패, 지방호족들의 반란 등으로 이미 붕괴 중이었다. 마침내 900년에 경상도 산골 출신의 견훤이 후백제를 선포했고, 901년에는 신라의 왕족이며,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렇게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고, 통일전쟁이 전 국토를 황폐하게 했다. ■ 후삼국 통일전쟁 뛰어든 후백제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37) 후백제의 발전과 해양활동 능력후백제 상선이 표류했던 대마도 북쪽 해안.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남북이 분단되고 전쟁을 벌였다. 아직도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지 못했다. 통일은 실제로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역사적으로 통일을 지향해 왔을까? 고대를 돌아보면 신라가 주도한 소위..

우리 해동(海東)은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는데, 그 폭과 둘레는 거의 10,000 리(里)나 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고구려(高句麗) 땅에서 일어나 신라(新羅)를 항복시키고 백제(百濟)를 멸망시켜, 개경(開京)에 도읍을 정하니, 삼한(三韓)의 땅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 이후로 5도(五道)·양계(兩界)를 정하니, 양광(楊廣)·경상(慶尙)·전라(全羅)·교주(交州)·서해(西海)·동계(東界)·북계(北界)가 그것이다. 모두 합하여 경(京)이 4개, 목(牧)이 8개, 부(府)가 15개, 군(郡)이 129개, 현(縣)이 335개, 진(鎭)이 29개이었다.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은 당(唐)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
고려의 명장 윤관이 세운 동북9성이 두만강 북쪽의 중·러 국경지대 부근에 있었다는 학술 주장이 처음으로 제기됐다.경복대학교 이인철 교수는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국경선으로 삼은 동북9성의 최북단이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둥닝(東寧)현 일대임을 관련 문헌과 현지 답사를 통해 밝혀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의 주장은 동북9성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지목한 학술적 성과이자, 고려의 국경선을 북만주까지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 윤관의 동북9성이 두만강 북쪽 中·러 국경지대에 있었다?동아일보 2017. 5. 23. 11:02 이인철 경복대 교수, 고려 동북국경은 '두만강 이북'설 주장"윤관의 동북9성 최북단은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중·러 국경지대" 경복대 이인철 교수가 ‘세종실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