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성, 수천년 전 韓민족을 증거하다-
이상에서 렬거한 우리나라 청동기 유물들의 대표적인 것들은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 거진 련계가 없으며, 모두가 소위 《북방계》문화와 관련되여 있다. 오늘 우리나라 령역 내에서 중국 청동기가 전파된 것도 매우 적고, 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도 매우 적다. ......
둘째로 고대 조선족의 많은 부분이 압록강 이북에서(료동, 료서, 열하, 내몽고의 일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경과하고 철기 시대로 이행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한 종족들이 진국보다 문화가 선진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문화가 남하하여 압록강 이남으로 전파되였다. 이 청동기 문화는 고조선인과 맥국인이 창조한 문화이였다.
필자는 고대 조선족의 청동기 문화의 기원은 료동, 료서, 열하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이 지역에서의 고고학적 조사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대 조선의 청동기 문화의 연원 문제를 결론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이상 몇 개의 실례에 불과하나 우리나라 령역과 료동, 료서, 열하, 내몽고, 장성 일대에 동일한 계통의 청동기 문화가 류포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광대한 지역에 거주한 고대 조선의 여러 종족들이 자기의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하였고, 또 그것이 공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상에 렬거한 고고학적 유물들이 조선, 료동, 료서, 열하, 내몽고의 일부 지역에 공통되고 있는 사실을 결코 우연한 현상이거나 또 고조선이 소위 《북방계 문화》의 영향을 받은 현상이라고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으며, 역시 이 지역들에 고대 조선의 제 종족의 장구한 세월을 두고 생존하면서 자기의 문화를 창조했다는 력사적 사실을 중시해 주는 것으로밖에 달리는 해석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1)
고조선의 청동기 사용 시기 문제도 아직 미해명의 문제로 남아 있다. 종전 일본 학자들은 조선에서의 청동기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 석기 시대로부터 한의 철기 문화를 수입함으로써 직접 철기 시대로 이행하게 되어 소위 《금석병용기》로 들어섰다고 주장하였다. 해방 후 우리나라(북한) 고고학계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분쇄하고 조선에서의 청동기 시대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 령역에서 발견되는 청동기들 중 많은 것이 철기 시대의 우물과 같이 출토되며, 순수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미 제3장 제1절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언급한 바 있었거니와 이 문제는 고조선과 맥국의 령역에서 청동기 유물을 조사 연구함으로싸만 풍부한 재료를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조선족과 맥족은 압록강 이북지역에서 청동기 시대를 경과하고 철기 시대로 이행했다고 인정된다.
오늘 료동, 료서, 하북성 북부 내몽고 등지에서 발견되는 철기가 전국 시대의 유물이라면 이 지역들에서의 청동기 유물들은 물론 그 이전 시기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들에서는 중국 청동기 문화와는 완전히 성질을 달리하는 청동기 유물과 함께 열하 지역에서는 서주 시대의 청동기도 대량 출토되고 있다. 서주 청동기가 아닌 청동기 유물들은 그 형태 상으로 보아 오늘 우리나라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들과 동일한 계렬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종래에 소위 《북방계 문화》라고 칭해오던 것인데, 나는 이것을 고조선과 맥국의 청동기 문화라고 인정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기술한 바와 같이 북이北夷 《고리국》을 《구리의 나라》라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열하 지역에서 대량으로 출토되는 서주의 청동기 문화 유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이 재료를 가지고 성급하게 열하 지역이 서주의 령역이였다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이 청동기 유물들은 아직 확실한 지층이 판명되지 않고 있다. 즉 이 서주 청동기의 사용자들이 서주인들이였다고 확증할 만한 재료가 아직 판명되지 못하고 있다. ......
요요컨대 고조선인과 맥국인들은 압록강 이북에는 오랜 옛날, 늦어도 기원전 12세기 이전부터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청동기 시대를 경과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2)
고조선의 과학기술 가운데 특기되어야 할 것은 청동과 철에 대한 지식과 그 응용기술이다. 청동의 발명은 국가를 출현하게 하는 등 인류사회 변화에 크게 영향을 끼쳤는데, 고조선지역은 고조선 건국 전인 서기전 2500년경부터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고조서 사람들은 단검 · 도끼 · 거울 등 그 용도에 따라 구리와 주석, 아연 등의 합금비율을 달리할 정도로 청동에 대한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청동기를 주조하는 기술도 매우 발달하여 출토유물에 대한 현미경 관찰에 의하면 기포가 전혀 없고 분자의 조직이 매우 고르다. 그리고 주물틀도 돌이나 모래로 만든 것은 물론이고 밀납틀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거울의 뒷면을 장식한 섬세한 잔줄무늬 등은 밀납틀을 이용함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3)
-거대한 성, 수천년 전 韓민족을 증거하다-
10여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아(亞)자 형태인 주봉 유적만 해도 총 면적이 15만㎡나 된다. 주위에는 성벽 같은 반원형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있다. 찬찬히 뜯어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2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석관묘, 그리고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 많은 적석총과 석관묘….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 여섯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석축건물지만 무려 232개나 된다니….
싼줘뎬에서 수습한 덧띠무늬 토기편. <츠펑/김문석기자>
# 청쯔산 정상에 선 나라는?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이며, 유적의 규모와 내용으로 보면 국가단계의 사회조직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내성에서는 최고위층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 10개가 확인되었습니다. 중국 학자들의 말처럼 고국(古國)의 형태가 분명합니다.”(이형구 교수)
탐사단의 눈을 끄는 것은 우리와의 친연성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그런데 샤자뎬 하층문화는 학자들 간 논란이 있지만 늦춰 잡아도 대략 BC 2000~BC 1200년 사이의 문화이다. 눈치 챘을 테지만 고조선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합니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 말입니다.”
이형구 교수는 “할석과 삼각석(견치석), 그리고 역삼각형의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인천 계양산성의 축성 방식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기자를 비롯한 탐사단은 청쯔산 정상에 널려 있는 이른바 덧띠무늬 토기편을 수습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 어마어마한 석성의 실체는?
츠펑에서 북서쪽으로 40㎞쯤 떨어진 싼줘뎬(삼좌점, 三座店)으로 향했다. ...
“치(雉·적을 제압하려고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가 도대체 몇 개야?”(이형구 교수)
이교수가 성의 행렬을 더듬으며 세어보니 확인할 수 있는 것만 13개나 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벽이다. 유적의 연대는 BC 2000~BC 1500년 사이(샤자뎬 하층문화)의 것이란다.
# 고구려·백제를 빼닮은 전통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이네요.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한 모습….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어요. 4000년 전에 이렇듯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견고하게 쌓았다니….”(이교수)
윤명철 교수는 “주거지에 샤자덴 하층문화 때의 토기편들이 널려 있다”면서 “치가 촘촘하게 있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교수가 실측해보니 치는 5m 간격으로 서 있었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성이 무너지지 않게 견치석을 적절하게 배치한 석성의 또 다른 특징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였고, 건물지 수십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되었다.
석성은 츠펑 지구를 포함한 발해만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축성술이다. 이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의 공심돈(치의 역할)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우리 축성술의 전통이다.
놀라운 석성과 제단터, 주거지, 무덤…. 어쩌면 이렇게 어제 본 청쯔산성과 오늘 확인한 싼줘뎬 석성이 빼닮았고, 이 전통이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또 한번 생기는 궁금증…. 고조선의 채취가 물씬 풍기지 않나. 정녕 고조선의 성은 아닌가.
확인된 치(雉)만 13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츠펑 산줘뎬(삼좌점, 三座店) 석성(BC 2000~BC 1200년).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구려 백암성과 백제 계양산성 등과 축조기법이 똑같다. 지난해 발굴이 끝났으며, 이번에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 이형구 선문대교수(왼쪽)가 성의 규모에 감탄하며 축조기법을 설명하고 있다. 츠펑/김문석기자
# 중원엔 하(夏), 동북엔 고조선?
중국학계의 분석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랴오시(요서, 遼西)의 샤자뎬 하층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청쯔산 같은) 유적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우한치 박물관 도록)
이형구 교수도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청쯔산과 싼줘뎬 같은, 수천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중국 학자들도 동의하듯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석관묘까지, 여기에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 말이다. 이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냐. 이형구 교수나 윤명철 교수는 확언하지 못하지만 뉘앙스는 짙게 풍긴다. 여러 증거로 보아 “중원 하왕조 시기에 섰던 동이족의 왕권국가”가 분명하며, 이것은 ‘4000년 전의 고구려성’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 ‘내가 고조선 유물·유적이요’하는 명문(銘文)을 달고 나오지 않는 이상 100%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의 것’을 빼다 박았지만 200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 고조선 연구의 밑거름
그러나 지난해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을 보았던 복기대 단국대 박물관 연구원은 “백암성 같은 고구려의 성과 너무도 똑같지 않으냐”면서 한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즉,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 134기를 분석한 주홍(朱泓) 지린대 교수는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은 정수리가 높고, 평평한 얼굴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는 ‘고동북유형’이 속한다”면서 “이 같은 유형은 랴오시 지역과 전체 동북지역에서 가장 빠른 문화주민”이라고 분석했다. 허베이성(하북생, 河北省), 산시성(산서생, 山西省), 산시성(섬서생, 陝西省), 네이멍구(내몽고, 內蒙古) 중남부 지구에서 보이는 ‘고화북유형’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결국 샤자뎬 하층문화인들은 동북유형의 문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측정된 12곳의 샤자뎬 하층문화 유적 탄소연대측정값이 BC 2400~BC 1300년이라는 점이나, 고조선의 연대와 부합된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막 발굴을 끝낸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은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이들 유적을 만든 이들의 문화전통은 동이의 것, 그 가운데서도 석성과 제단, 돌무덤의 전통을 쌓은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전통의 흔적은 청쯔산, 싼줘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아니 그 이상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 할 탐사단의 여정은 그 머나먼 세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조선이 아니냐”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기자의 조급함에 스스로 채찍을 가한다.(1)
(1)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660-662쪽
(2)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671-673쪽
(3)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757쪽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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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청동기의 발명은 매우 중요하여 토기의 발명 이래 인류의 가장 큰 문화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발해 연안에서 청동기가 발견된 유적으로는 발해 연안 북부 중국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과 내몽골 적봉(赤峯)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이 있다. 대성산 유적에서는 순동으로 만든 장식품이 출토되었는데 이 시기는 기원전 2000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우하량 적석총에서 홍산문화 시기의 청동을 제련할 때 쓰는 도가니와 청동 찌꺼기(slag) 그리고 청동기 조각이 수습되어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제련된 청동 덩어리의 C¹⁴측정연대는 기원전 1900년쯤으로 측정된다. 그리고 요동반도에서 청동기를 반출하는 우가촌(于家村) 적석총의 C¹⁴측정연대는 기원전 1500~1300년으로 측정된다. 한반도에서도 요동반도와 같이 적어도 기원전 15세기쯤에 이미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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