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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통사 1.8 2008년 8월 31일 신동아 2008년 9월호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홍산문명 VS 황하문명 4000년 전쟁 내몽고 횡단 4000km 학술 르포 中 동북공정 무너뜨릴 칼과 방패를 찾아서 신동아 2008년 09월 호 ● 황하문명과 분리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일어난 홍산문명 ● ‘알타이語族’은 람스테드의 실수, 이제는 홍산語族이다 ● 전쟁으로 꽃핀 청동기문화, 난하에서 만난 홍산과 황하문명 ● 고원 초원의 한계, 일정한 수 이상의 인구를 수용하지 못한다 ● 왕소군과 문성공주 사례로 본 중국의 역사의식 ● 몽골을 지배한 흉노-선비-돌궐-요-금-몽골-청은 같은 뿌리 ● 홍산은 토기와 옥기와 청동기가..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통사 1.1 신채호저 《조선상고사》 〈조선 민족의 구별〉 『고대 동아시아 종족은 우랄 어족과 중국 어족의 두 파로 나뉘었다. 한족·묘족·요족 등은 후자에, 조선 민족·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다. 조선 민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골·퉁구스 등이 되고, 흉노족이 분화하여 돌궐(신강족)·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이 되었다. 오늘날 몽골·만주·터키·조선 네 개 민족 간에는 유사한 어휘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것은 몽골제국시대에 상호작용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고대사를 보면, 조선과 흉노의 인명·지명·관직명이 동일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들이 상고시대에 동일한 어족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목차 야발 편집 1. 통사 1.1 신채호저 《조선상고사》 〈조선 민족의 구별〉 1.2 2007년 3월 13일 서울신문 〈“中 동북공정은 패권주의 역사관, 요동· 한반도 하나의 역사로 봐야”〉 1.3 2007년 3월 15일 헤럴드경제 〈“중국 3황5제ㆍ일본 천황계 그 뿌리 는 韓民族”〉 1.4 2007년 7월 31일 동아일보 〈中 동북공정에 영향 받은 역사학계 4가 지 새 인식틀〉 1.5 2007년 10월 16일 뉴스메이커 745호 〈[커버스토리] ‘발해문명’ 창조 주인 공은 우리 민족〉 1.6 2008년 2월 28일 플러스코리아 〈문헌으로 보는 동방문명의 뿌리 韓族〉 1.7 2008년 3월 31일 플러스코리아 〈한국 고대사 체계 확실히 바꿔야 한다. 동북공정은 만..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26) 6.26 서울 암사동유적 – 6200년 전~3400년 전(6200∼3400 B.P.) 『사적 제267호.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153-157 일대에 위치한다. 한강변 자연 제방상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신석기시대의 마을유적으로서는 가장 대규모에 속하며 주거지와 함께 야외 화덕자리,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와 각종 석기 등이 확인된 대표적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암사동유적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많은 양의 유물이 노출되면서 일본인 학자 요코야마[橫山將三郞]의 지표조사에 의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국내 학자들에 의해 소규모의 발굴조사나 지표조사 등을 통해 유적의 성격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25) 6. 25 궁산문화(弓山文化); 6000년 전~5000년 전 『북한에서 1950년 온천 궁산유적을 처음 발굴한 이후 이 지역의 신석기시대 물질문화양상에 대하여 명명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1957년 봉산 지탑리유적의 발굴에서 궁산문화는 전기와 후기(1기와 2기)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평양 금탄리유적 발굴보고서에서 금탄리를 1·2 문화층으로 나누어보고 이를 기존의 ‘궁산문화’에 후행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궁산문화는 4기의 편년 틀을 갖추게 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금탄리 1·2 문화층을 ‘궁산문화’ 속에 포함시키면서 궁산문화 4기 편년체제가 공식화된다. 그 이후 평양 남경유적의 발굴(1979∼1981년)을 통해 남경 1기와 2기를 설정함으..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24) 6.24 통영 연대도유적 – 7300년 전~6600년 전(BC5328∼4660년) 『사적 제355호(지정명칭은 통영 연대도패총). 경상남도 통영군 산양면 연곡리 24 일원이며 연대도에 위치한다. 연대도는 통영항에서 남쪽으로 18㎞ 떨어져 있으며, 오곡도와 함께 연곡리를 이룬다. 섬은 경사가 급하고, 남쪽 해안에는 높이 10m가량의 해식애(海蝕崖)가 발달하였다. 북서쪽 해안의 오목한 곳에 ‘연대’ 마을이 있고 그 동쪽에 유적이 위치한다. 섬의 주봉에서 북동쪽으로 가장 깊은 골짜기가 흘러내려 삼각주상의 대지가 형성되어 있는 곳에 패총이 입지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며, 발굴조사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밭으..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23) 6.23 부산 가덕도 장항유적; 7200년 전~6400년 전(BP 7200년~BP 6400년) 가덕도 신석기유적은 BC5,000년~BC4,000년 무렵에 해당하는 묘역시설로 BC6,000년까지 즉 8,000년 전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총 48구의 인골이 나왔다. 옥제품 6점과 흑요석도 출토되었다. 『남해안지역 신석기사람들 기원전 8,000년을 전후하여 시작한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토기의 발생, 석기 제작 방법의 변화, 새로운 도구가 등장하는 시기이다. 빙하기(홍적세洪績世)를 지나 간빙기(충적세沖積世)로 접어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인류는 정주생활을 선택하였고, 새로운 도구를 이용한 기술의 발달은 구덩식집자리(竪穴住居址), 야외 화덕(野外爐址),..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22) 6.22.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7000년전∼3500년 전 『국보 제285호(지정명칭은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999–1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울산 태화강 지류에 해당하는 대곡천변에 입지하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깎아지른 절벽에 너비 약 8m, 높이 3m의 판판한 수직 암면에 그림이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다. 주변 10곳의 암면에서도 소수의 그림이 확인되고 있다. 바위의 암질은 셰일(shale)과 혼펠스(hornfels)로 구성되어 있다. 암면의 방향은 북향으로 석양이 질 무렵에만 잠시 빛이 들어오며 윗부분이 앞으로 돌출된 바위그늘[岩陰] 구조로 되어 있다. 유적 발견은 천전리암각화를 발견한 이듬해인 1971년..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21) 6.21 울산 신암리유적 – 7000년 전~5000년 전(BC5000년~BC 3000년)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일대에 위치한다. 유적이 위치하는 신암리부락은 울산시와 부산시의 중간 위치에 해당하는 해안부락으로 1019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유적 주변은 해발 100m 이내의 야산지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유적의 정북향에 솟아 있는 해발 209m의 용곡산에서 발원한 산간지류가 인근마을인 용리(龍里)와 나사리(羅士里) 사이로 흘러 신암리 일대의 저평한 충적지대를 지나 바다로 유입된다. 유적 북쪽의 용동마을 주변의 평지성 구릉지대에는 30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신암리유적은 1935년 일본인 학자 사이토[齋藤 ..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20) 6.20 울산 세죽유적; 7500년 전~7000년 전(BC5500∼BC5000년)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661∼700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청량면의 덕하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진행하는 외황강의 하구 북안에 입지한다. 만(灣) 주변은 매립되어 온산공단의 일부로 개발되었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울산만의 바로 남쪽에 해당한다. 유적주변에서 세죽유적과 출토 유물에서 유사한 울산 성암동패총, 울주 우봉리·신암리, 경주 하서리 유적 등이 분포한다. 특히 성암동유적은 본 세죽유적과 입지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는 데 비해, 우봉리유적은 바다 쪽이 절벽을 이루는 대지상의 평탄지에 흑색토층에서 유물이 채집되고 있다. 이 양자는 조기 당시의 해안선 추정과 기후, 자연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