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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고령군이 2024년 6월 18일 대가야 궁성지 발굴과 정비사업 일환으로 추진 중인 ‘추정 대가야궁성지 I-1구역 정밀발굴조사’에서 대가야 시대에 축조된 궁성의 북벽부 토성벽 일부와 해자 등 궁성의 존재와 범위를 알려주는 방어(放語) 관련 시설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고령군은 2017년 대가야읍 연조리 594-4번지에서 토성과 해자로 추정되는 시설을 발굴한 이후, 2019년 '대가야 궁성지 발굴 ․ 정비사업 기본계획'을 수립해 대가야 궁성과 관련된 발굴조사를 수차례 진행했다. 그러나 아싑게도 통일신라시대 토축시설만 확인돼 대가야 궁성과 관련된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 고령군은 2024년 3월부터 대가야읍 연조리 555-1번지 일원에 대한 ‘추정 대가야궁성지 I-1구역 정밀발굴조사’..
신용하교수는 5세기 초 일본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의 주체 이름을 가라(加羅), 특히 금관가라(金官加羅) 기마부대와 그 연합 세력이라고 특정해 설명하였습니다. 『AD 399년에 백제 아신왕은 신라를 병합하고자 백제·금관가야·왜의 동맹을 맺어 3국 연합군을 편성했다. AD 399년에 왜는 기병이 없이 모두 보병이었다. 백제·금관가야·왜의 연합군은 신라군을 격파해 400년에 신라 수도 경주를 점령했다. 그러나 신라 왕이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5만 명의 동아시아 최강의 기병 부대를 남하시켜서 백제의 3국 연합군을 참패시켰다. 백제 4만 명의 보병은 대부분 전사하고 포로가 8000명이었다니 그 참패를 추정할 수 있다. 금관가라의 기병부대와 왜 보병도 참패해, 금관가라의 수도 김해까지 점..
경주역사유적지구는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5개 지구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시조온조왕조에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한국고대사료DB,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3r_0020_01..
고구려는 시조 동명성왕 때(BC 37년) 졸본(광개토태왕릉비에는 '홀본') 현 랴오닝성 환인 오녀산성에 첫 도읍을 하였고, 2대 유리왕 때(3년) 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10대 산상왕 때(209년) 같은 지린성 지안의 환도성으로 두 번째 천도한 후, 20대 장수왕 때(427년) 현 북한의 평양으로 마지막 천도해서 3번 천도했다고 합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수도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1940년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나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의 학설을 집대성해 발표한 내용이 그대로 견지돼 온 것입니다. 출처;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신동아 (donga..
고구려는 여러나라시대에 BC37년부터 668년까지 존속했던 우리 겨레의 가장 강력했던 왕국이었습니다. 왕국이 아니라 제국(Empire)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구려의 강역은 어디까지였을까요? 우리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고구려의 전성기 강역 지도가 아래와 같습니다.동북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고 하기에는 왠지 작아보이는데요.과연 고구려의 전성기 강역이 이 정도였다는 것이사서 기록과 맞는지 궁금합니다. 7차 교육과정 고구려 전성기 지도. 국정 국사 교과서의 지도가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도 고구려 전성기 강역 지도가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와 똑 같습니다. 고구려의 전성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사기》에는 하북성 지역(지금의..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 1867~1935년)는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미 1910년 이전에 한반도에 상륙해 각종 고건축 조사를 벌였으며, 일본강점기에는 조선고적조사연구회를발판으로 경주와 평양 일대 등지의 한반도 고고학 조사를 진두지휘했습니다. 세키노 조사단은 1911년 9월 30일 점제현 치지 발견,1911년 10월 15일 장무이묘 발견,1911년 10월 15일 며칠 후 대방군 치지 발견.1913년 9월 23일 낙랑군 치지 발견,1913년 9월 26일 점제현 신사비 발견,그리고 1923년 10월 22일 효문묘 동종을 발견하였습니다.이러한 유적, 유물 등을 근거로 일본은 낙랑군재평양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2011년 2월말에 SBS에서 방영한 '3.1절 특집 SBS스페셜 역사전쟁, ..
낙랑군의 위치와 관련하여 대략 4가지 학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 낙랑군 및 고조선의 갈석산과 습수, 열수, 산수, 패수의 위치 ‘낙랑 1’은 심백강과 김봉렬 등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하북성설’입니다.‘낙랑 2’는 윤내현과 이덕일 등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난하설’입니다.‘낙랑 3’은 신채호와 정인보 등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했던 ‘낙랑군 재요동설’입니다.‘낙랑 4’는 노태돈과 송호정 등 대다수의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평양설’입니다.(1) 신채호선생은 한사군은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위씨가 망한 뒤에 한나라는 진번·임둔·현토·낙랑 네 개 군을 설치했다. 4군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삼한의 연혁에 관한 문제에 뒤지지 않는 조..
'여러나라시대'는 '열국시대'라고도 쓰고요, 기존 '삼국시대'라는 용어를 대체하고자 하는 개념입니다. 사실상 고조선(위만조선 포함) 멸망 후 여러 왕국들이 등장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여러나라(왕국)시대'라고 봅니다. BC108년 위만조선이 한漢에 멸망하여 그 자리에 한漢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이 세워 집니다.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위만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인가하는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또 위만조선이 기자조선, 고조선의 영토를 완전히 점유했는가하는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한사군 중 가장 핵심적인 낙랑군이 오늘날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였다는 것이 통설이라고 합니다. 『한사군의 위치를 중국의 요동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한반도 중·북부 및 남만주 일부에 걸쳐 있었..
강서대묘는 북한 남포특별시 강서구역에 있는 고구려 벽화 고분으로 이웃한 2개의 큰 무덤과 함께 강서삼묘로 불립니다. 고구려 평원왕 또는 영양왕의 무덤으로 추정합니다. 강서3묘 전경(출처; '한왕묘'와 강서3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daum.net)2019. 5. 2.) 널방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비천 · 비운 · 신선 · 산악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신은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하고 인기를 모은 방위신(方位神)으로서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 북쪽의 현무(玄武)를 일컫습니다. 강서대묘 새를 탄 선인(출처; 강서대묘 깊이보기 3 - 비천과 선인 (daum.net)2019. 6. 27.) 강서대묘 비천상(출처; 강서대묘 깊이보기 3 -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