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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천추총 천추총은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집안 통구고분군을 이루는 6개 고분군 가운데 마선구고분군(麻線溝古墳群)에 속하는 고구려고분이며, 마선구평야에 위치한 대형 돌무지무덤〔積石塚〕입니다. 천추총(千秋塚)이라는 명칭은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이라는 명문에서 유래하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35년(소화 10) 10월 1일에 조선총독부에 의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의 공식명칭은 ‘마선구 1000호묘’입니다. 천추총은 훼손이 심하여 원상을 잃었지만 원래는 10층 정도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덤 평면은 한변 길이 63m 정도의 네모난 형태이며 높이는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10.9m, 파괴가 심한 동쪽은 7.9m 정도입니다. 무덤..
국내성(國內城)은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2년(서기 3년)부터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 졸본성에 이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중국 길림성(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통구성으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며, 현재 성벽이 상당 부분 훼손되어 있습니다. 집안(지안) 서북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이 있는데, 이 때부터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어 조성되어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공격 받을 경우에 산성인 위나암성에 피난해 적과 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1)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환도성(丸..
‘외계인 머리’를 한 유목민 전사의 비밀[책&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⑬ 편두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19-09-20 06:01편두는 범접할 수 없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욕망 표출한 풍습더 기묘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부를 세습하는 이 시대 특권층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미확인비행물체(UFO)를 타고 온 외계인을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는가? 보통 오징어 같은 연체동물이나 머리가 길쭉한 대머리 같은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까. 이제까지 외계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외계인으로 뾰족한 대머리 형태를 한 생명체를 떠올린다. 이런 이미지는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는 2천년 전 유라시아 초원에서 발흥한 유목민 흉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
세계문화유산 오녀산성은 요녕성(랴오닝성) 본계시(번시시) 환인현 오녀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됩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홀본성(忽本城)이라고 하고, 삼국시대 관련 다른 기록들은 대첼 졸본성(卒本城)이라 쓰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수도를 홀승골성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녀산성 성벽 전체 둘레가 4574m에 이르는데, 그중 4189m는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고,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 동쪽과 남쪽 그리고 정상부의 주요 계곡부에만 총 길이 565m 정도 인공 석축 성벽을 축조하였다고 합니다.(1) 이형구교수는 요동반도는 고조선의 강역이지만 고구려가 3세기에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4세기 말 광개토대..
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풍납토성 고고학적 발굴을 알아봅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2015년 7월 13일 풍납 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인지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이 있었습니다. 『‘서울 풍납 토성 백제왕성 심포지엄’에서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풍납 토성에 대한 첫 발굴조사가 1961년 이뤄진 이후 지속적인 발굴 작업 결과 풍납 토성이 백제 한성기(漢城期)의 도성이었다는데 학계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며 “풍납 토성은 인접한 몽촌토성과 함께 한성기 도읍 기간 중 도성을 구성하던 성이었다”고 말했다. 이희진 역사문화연구소장은 풍납토성이 백제의 평범한 성에 불과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우선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유적..
진파리고분군은 동명왕릉의 오른쪽 뒤편에 산재해 있는 10여개의 무덤입니다. 북한은 고구려 개국공신들인 오이(烏伊)‧마리(摩離), 부분노(扶芬奴) 등과 평양 천도 후 장군이나 학자, 외교관인 고흘(高紇), 온달, 이문진(李文眞), 예실불(芮悉弗) 등의 무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추론하는 근거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중 '진파리1호분'(국보유적 181호)과 '진파리4호분'(국보유적 제180호)에서는 사신도가 그려진 화려한 벽화가 확인됐습니다. 북한은 '진파리4호분'을 온달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로 봅니다. 무덤 안 북벽에 청룡과 함께 상서로운 새를 탄 여자 신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한학계에서는 벽화무덤 양식을 토대로 두 무덤을 왕릉으로 평가합니다. 남한의 일부 연구자는 북한이 양원왕 때의 ..
미소띤 얼굴, 네모난 모자 “꼭 닮았다”…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 유물전동아일보업데이트 2015-11-25 03:00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김상운 기자 국립부여박물관-中 뤄양박물관충남 부여 정림사 터에서 발굴된 인물상(왼쪽 사진)과 중국 북위시대 영녕사에서 나온 인물상. 둘 다 농관(籠冠)을 쓴 모습이 닮았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후덕한 얼굴 위로 각이 진 네모난 모자가 서로 닮았다. 중국인들의 옛 복식으로 알려진 농관(籠冠)을 쓴 인물상이다. 하나는 중국 북위시대 영녕사(永寧寺), 나머지는 부여 정림사(定林寺) 터에서 나왔다. 영녕사는 6세기 초엽, 정림사는 6세기 중엽 이후 각각 건립됐다. 백제 사비시대의 왕실 사찰이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국립부여박물관은 중국 ..
낙랑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낙랑국(樂浪國) 또는 최씨낙랑국(崔氏樂浪國)은 1세기경인 원삼국시대 때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비정되는 국가이다. 추정하는 위치나 이름으로 인해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과의 관계를 두고 논란이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최리라는 낙랑국 왕의 존재로 편의를 위해 최씨낙랑국이라고도 부른다.역사[편집]서기 14년, 신라가 왜의 침입을 받은 것을 기화로, 낙랑 역시 신라를 공격하였다.[1] 《삼국사기》에 따르면, 낙랑의 왕 최리(崔理)는 서기 30년 경에 옥저(沃沮) 지역으로 사냥을 나온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을 만나 사위로 삼았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간 후 최리의 딸(낙랑공주)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동명왕릉'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시의 력포구역 룡산리의 용산에 있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용산에 있었던 이 무덤이 '동명왕묘'로 전해졌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1891년 조선 고종 때 '동명왕릉'으로 추봉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동명왕릉이 동명성왕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기에 '전(傳) 동명왕릉'이라고도 합니다. 다만 적어도 근현대 이후 갑자기 생긴 게 아닌, 고려시대 때도 기록이 확인되는 정말 오래된 유적인 것은 확실합니다. (1)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옭기면서 졸본에 있던 동명왕의 무덤을 함께 옮겼다고 주장합니다.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졸본에 있..
금관총은 처음으로 금관이 출토되어서 '금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고요,식리총은 금동 장식신발(식飾 장식, 리履 신)이 확인되어서 '식리총'(장식신발총),금령총은 금방울(금金, 령鈴 방울)이 출토되어서 '금령총'(금방울총),서봉총은 스웨덴(서전·瑞典)의 황태자(아돌프 구스타프 6세·재위 1950~73)가 봉황(鳳凰) 장식이 달린 금관을 수습해서 '서봉총',호우총은 청동제 그릇(호壺 병, 우杅 사발)이 출토되어서 '호우총'(병사발총),천마총은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이 출토되어서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왕가의 무덤’으로 꼽히는 대릉원 지구에는 60여기의 고분(형태가 남아있는 고분만)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고분의 90% 이상이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돌무지덧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