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여러나라시대 (95)
력사를 찾아서
아직도 오리무중인 ‘위례성’의 위치 한정석 편집위원 승인 2015.01.31 01:08백제 첫 도읍인 ‘위례’의 지명을 놓고 지방자치 단체들 간에 한바탕 선점 투쟁이 일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 서울 송파구가 최근 ‘위례동’ 지명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 파열음을 내고 있는 가운데 충남 천안시가 뛰어들었던 것.천안시는 최근 백제 온조왕 사당 건립을 추진하는 등 ‘위례’ 지명 선점에 사활을 걸고 있다. 천안이 ‘위례’ 지명을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만큼 천안시만 쓸 수 있다는 입장이다.누구나 백제가 처음 건국한 도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것쯤은 배워서 안다. 온조가 부여에서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한 곳이 바로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풍납토성 그런데 이 위례성은..
신라가 마립간시대로 넘어가기 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유적들을 알아봅니다. 경주 금척리고분군, 경주 조양동유적, 경주 사라리유적, 경주 덕천리유적들이 있습니다. 경주 금척리고분군은 대릉원의 돌무지덕널무덤(적석목곽묘)보다 1세기 앞선 4세기부터 조성된 사실이 밝혀져, 신라 6부 중 하나인 모량부가 5세기 등장한 신라중앙의 마립간에 앞서 금척리 일대를 지배한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경주 조양동유적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무덤은 1981년 말 발굴된 38호 묘인데요, 무덤 내부에서 다량의 철기와 함께 중국 한나라에서 수입한 청동거울이 4개나 출토됐습니다. 최종규 학예사는 거울에 기준하여 이 무덤이 서기 1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주변에서 함께 발굴된 무덤들이 1∼3세기까지 조성된 것이라고 추정..
가야고분군은 2023년 9월 17일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번에 등재된 고분군은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 ▲경남 합천 옥전 고분군 ▲전북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등 7개입니다. 한국의 세계유산 가야고분군 ‘가야고분군’은 1~6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가야’의 7개 고분군으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이다. 7개 고분군은 대성동고분군, 말이산고분군, 옥전고분군, 지산동고분군, 송학동고분군,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이다. 가야고분군[사진출처-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추진단] 신청유산은 지리적 분포, 입지, 묘제, 부장품을 통해 다수의 개별..
■ 1977년 고령 지산동 고분군 - 44호분, 45호분 발굴 1977년 11월 고령 지산동 고분 44호분과 45호분 발굴을 경북대와 계명대가 각각 맡았다.함께 답사에 나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66·고고학)는 “44호분 옆 공터에 베니어판으로 지은 가건물을 짓고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발굴을 했다”며 “1977년 겨울은 유독 추웠다”고 회고했다. 발굴한 지 39년 만에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앞에 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그의 등 뒤로 산 능선을 따라 대가야 고분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이 산에는 고분 70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한반도 최다(最多) 순장묘 발굴 1977년 11월 시작된 44호분과 45호분 발굴은..
■ 김해 대성동 고분 “예전부터 ‘애꾸지’ 아이가.”1989년 7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온통 밭이던 야트막한 구릉 일대를 조사한 신경철 당시 경성대 교수(65·현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가 동네 토박이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애꾸지가 혹 ‘애기 구지봉’을 줄여 사투리로 부른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구지봉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탄생지. ‘그렇다면 애기 구지봉은 그의 후손인 역대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신경철 부산대 교수가 21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 29호 고분을 복원한 노출전시관에서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해=서영수 기자 kuki@donga.com“할배, 여기 옛날 이름이 뭡니까?” 이곳은 반경 500m 안에..
신채호 조선상고사열국의 분립삼신설이 파탄되어 삼한에 대한 믿음이 추락하니, 이것은 유사 이래 조선 최대의 위기가 되었다. 일부 인민들은 신인(神人)과 영웅의 허위성을 깨닫고 자치촌·자치계 같은 것을 설립했다.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일을 결정하고자 한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증거로는 진한부·변한부 같은 것이 있다. 이 외에도 역사책에 누락된 것들이 많을 것이다.하지만 미신을 타파하고 우주와 인생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등장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는 조선보다 문화가 저급한 예(濊)·선비·흉노·왜 같은 야만족들뿐이었다. 진보에 도움이 될 만한 벗들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은 장구한 문화를 보유했지만, 왕권을 옹호하는 사상과 학설밖에 없었으므로 중국의 문화를 수입한 것은 도리어 민중의 진보를 방해..
고구려 문화유산은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대한민국에 산재해있습니다.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애초 2000년경부터 유적의 세계유산 등록을 단독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므로 2003년에 등록될 예정이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북한(북조선)의 단독 등록에 반대하여 길림성(지린성)에 산재한 고구려 유적의 등록신청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적이 2004년 동시 등록이라는 형태로 등록되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에 산재한 고구려 유적은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무덤군(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이라는 이름으로, 북한(북조선)에 산재한 고구려 유적은 '고구려 고분군..
왕호시대는 서기 514년 법흥왕 때부터였다. 신라가 이렇게 늦게 중국식의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한민족의 고유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회였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법흥왕은 군사행정을 정돈하여 병부를 설치하였고 율령을 반포하여 문무백관들의 공식 복장에 차등과 서열을 두는 제도를 제정하였다.대외관계에도 노력을 기울여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냈고 가야와는 혼인동맹을 맺었다.그리고 불교를 공인하였고 제방들을 수리하여 농업생산 증대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재상에 해당하는 상대등 제도를 실시하였고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동아시아의 다른 왕조들과 대등한 국가임을 천명하였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까지는 10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고 신하들은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불..
길림성의 고구려 유적 중국 장춘시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에서 왕건군(王建群) 소장과 저자뒤에 보이는 건물이 구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중국의 광개토대왕릉비 전문가인 왕소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1990년 8월, 중국 북경 수도비행장에서 쌍발 프로펠러기를 타고 연길 비행장에 도착하여 발해 고분 발굴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 고구려 수도 국내성과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길림성 집안시로 발길을 옮겼다. 연변박물관 엄장록(嚴長錄) 선생이 동행하여 길을 안내했다. 아침 일찍 연길역을 떠난 천진(天津)행 급행열차는 길림역(吉林驛)까지 350km를 무려 7시간여 동안 달렸다. 길림역 한 정거장 앞의 흥융역(興隆驛) 부근에는 고구려시대의 용담산성(龍潭山城)과 함께 송화강변(松花江邊)에 자리한 부여시대의 동단산성(東團山城..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쳤다. 성왕은 신라 · 가야와 연합하여 고구려군을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을, 신라는 한강 상류유역을 차지하였다.이 시기에 백제 공주가 신라에 시집가는 등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으로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말년에 신라가 배신하여 백제의 동북변을 차지하자 성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신라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은 중국의 남조와는 물론 북조(당시의 북제)와도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북제는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라는 작위를 내렸다. 이는 백제가 동청주를 지배하는 것을 승인한 것이다. 백제는 일찍이 서기 245년경에 중국의 동북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