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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고려사절요는 조선 전기 문신 김종서 외 28인이 고려시대 전반을 편년체로 정리한 역사서이다. 『고려사』가 완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완성하였으며, 대체로 『고려사』를 축약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고려사』에 없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김종서는 조선전기 함길도 도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83년(우왕 9)에 태어나 1453년(단종 1)에 사망했다. 1443년 함길도 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인사권을 전담하기도 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를 찬진했고, 1452년에는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 편찬 책임관을 맡았다. 좌의정으로 단종..

'황제'를 '제후'로.. 조선이 '고려사' 고쳐 썼다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지식산업사·2만2000원)에서 “역사학계는 ‘고려사’ 편찬의 직서(直書·그대로 씀) 원칙과 객관성을 과도하게 평가했고, 고려의 황제제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밝혔다. 북한 개성에서 출토된 고려 태조 왕건 상. 머리에는 황제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 동아일보DB 노명호 교수, 신간서 '고려사' 분석.. '고려 황제' 부정 현재까지 이어져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가 사대명분론의 영향으로 고려의 황제국 제도를 제후국의 제도로 낮춰 서술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지식산업사·2만20..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옛사람의 격식을 따르지 않고 거침없이 종횡으로 치달려서 그 기세가 끝도 없이 크게 펼쳐졌으며, 당시 조정의 중요한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려사’ 이규보열전) 고려사에 실린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문장에 대한 평가다. 짤막하지만 시와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외교 문서 작성을 도맡은 이에게 걸맞은 찬사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규보가 살다 간 시기 고려는 무신 정권과 대몽 항쟁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내우외환이 겹친 상황이었다. 후덕한 인상의 이규보 초상화. 시와 술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그의 삶을 보여 주는 듯하다. 서울신문 DB #긴 기다림 끝 명예 얻었으나… 그의 인생 역시 거침없는 글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

이승휴(李承休, 1224년 ~ 1300년 11월 13일(음력 10월 2일))는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다. 자는 휴휴(休休),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다. 본관은 가리로, 가리 이씨의 시조다. 9세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세에 신서(申諝) 밑에서 《춘추좌씨전》과 《주역(周易)》을 익혔다. 14세에 아버지 상을 입고 대부경(大僕卿) 임천부(林天敷)의 아내(외가 대고모)인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 밑에서 양육되었다. 그 후 몽골의 고려 침입으로 고려 정부가 천도(遷都)한 강화도로 들어가서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우 관계를 맺게 된다. 29세가 되는 1252년(고종 39년)에 과거 시험에 급제했다. 과거 급제 후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으로 금의환향했으나..
『삼국유사』의 「고조선(古朝鮮)」 기사에서 민족주의 사학자들 사이에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고기운석유환인(古記云昔有桓因)”이란 부분이다. 1512년 중종 임신년 본에는 '桓囯'으로 되어 있는데, 1916년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인사동에서 구입하여 소장하다가 일본 텐리(天理)대학 도서관에 기증하였던 순암 수택본에는 ‘囯’자를 ‘因’자로 묵서(墨書)로 고친 것이 역력하다. 그러므로 이마니시류가 조작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친 것은 순암 안정복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9) 우리 민족의 창세기 『삼국유사』2022.04.05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7) 『삼국유사』 라. 환인(桓因)..

일연은 고려 후기에 『삼국유사』 등을 저술한 승려이다.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에 태어나 충렬왕(忠烈王) 15년(1289)에 사망했다. 고종(高宗) 6년(1219),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수행을 거듭해 구산문 사선의 으뜸이 되었다. 몽고 침입 후에 무주암에서 깨달음을 얻고 남해 정림사에서 대장경 제작에 참여했다. 이어 원종(元宗)의 부름을 받아 강화도의 선월사에 머물며 설법하였다. 1277년부터 4년간 청도 운문사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키고 그 즈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283년에 국사가 되었다. 휘는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 ‧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 성은 김(金)씨로 알려졌으나 ..
가끔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고대사에서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정사(正史)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아닌가, 그런데 그게 과연 믿을 수 있는 책인가? 사대주의 사상으로 쓰여진 책 아닌가?” ■ [유석재의 돌발史전] 삼국사기는 과연 사대주의 역사서인가? 삼국사기에 대한 세 가지 고찰 국보로 지정된 '삼국사기'. /문화재청 저도 오래 전 청소년 시절에, 지금 표현하자면 ‘국뽕’이라 말할 수 있는 생각에 젖어 있었던 때가 잠깐 있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막 출간된 ‘환단고기’를 읽고 나서 저 스스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무렵 저는 “삼국사기는 사기품이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유사품이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학의 역사학과에 진학하고 ..

김부식은 고려전기 직한림,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075년(문종 29)에 태어나 1151년(의종 5)에 사망했다. 신라 무열왕의 후손으로, 송의 서긍조차도 박학다식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묘청의 난 때 원수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을 지휘 통솔하여 난을 진압했다. 본인이 주도한 윤언이·한유충 등의 지방좌천 인사가 번복되자 정치보복을 염려하여 세 번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인종의 명에 따라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바쳤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얼굴이 검고 우람하였으며 고금의 학식에 있어 김부식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신라 무열왕(武烈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