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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제6공화국 : 박근혜정부(2013년 2월 25일~2017년 3월 10일) 세월호에 외력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세월호 사고 원인은 그동안 국내외의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선체에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고선 사고 당시와 같은 급격한 선회와 기울기를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져 왔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선체의 충격 흔적은 세월호의 급선회가 외부의 힘으로 발생했다는 것을 보여줄 결정적 단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외력의 흔적은 선수 좌측면에서 발견됐다. 선체조사위원회(이하 선조위)가 용역을 주고 조사한 결과, 선체에 변형을 줄 정도의 충격이 선수 좌현 쪽에 가해진 것이 발견됐다. 특히 충격 부분은 세월호 선수 좌현에 있는 심한 스크래치 자국과도 일치했다. 선체 외판에 충격의 흔적들이 나오게 되면서 세월호..
제6공화국 : 이명박정부(2008년 2월 25일~2013년 2월 24일) 2018년 3월 28일 방송된 KBS2 '추적 60분''8년 만의 공개, 천안함 보고서의 진실' 편에서는 천안함 사건 배후 북한설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추적 60분'을 통해 천안함 사건이 다시금 화제가 된 가운데,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가 아닌 잠수함과 충돌해 침몰했다'는 천안함 충돌론이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사진='추적 60분'을 통해 천안함 사건이 다시금 화제가 됐다. 지난 2014년 경성대 김황수 물리학과 명예교수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연구원(기계공학)인 머로 카레스타는 국제 학술지 '음향학과 진동학의 진전' 온라인 판에 '정말 무엇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는가?'라는 제목의 공동 연구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제6공화국 : 노무현정부(참여정부, 2003년 2월 25일~2008년 2월 2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 10월 4일 오전 이번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선언형식으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양 정상은 이날 오전 양측 실무진이 조율한 선언형태의 합의문에 직접 서명한 뒤 함께 선언을 발표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7신 : 3일 밤 10시 49분] 노 대통령 답례만찬 주최...김 국방위원장은 불참 아리랑 공연이 끝난 뒤인 3일 저녁 10시 경 노무현 대통령은 인민문화궁전에서 북측의 환영에 화답하는 답례만찬을 열었다.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북측 인사 130명과 남측 공식수행원, 특별수행원이 만찬에 참석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나오지 않았..
제6공화국 : 김대중정부(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연중기획 DJ탄생 100년「다시 만난 김대중」은 KBS 광주총국이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준비한 기획 연재물입니다. 월 1회 제작해 '뉴스 7 광주전남'과 '광주전남 9시 뉴스'에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한국인 최초 노벨상 수상 업적을 다뤘습니다. 1970년대 4대국 안전보장론 제시로 한반도 전쟁 억제와 동북아평화 체제 구축 비전을 제시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78년부터 꾸준히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고,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2000년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선정됐습니다 . 한반도를 넘어 전 지구적 평화공동체를 꿈꿨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렸던 민주·인권·평화는 ..
제6공화국 : 김대중정부(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2000년 6월13일 오전10시27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측과 한반도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이날엔 공개석상에 잘 나오지 않아 은둔생활을 한다고 알려졌던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김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순안공항에 미리 와 기다리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마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대통령기록관 2000년 6월13일 오전10시27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측과 한반도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이날엔 공개석상에 잘 나오지 않아 은둔생활을 한다고 알려졌던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
제 6공화국 : 김영삼정부(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1995년 삼일절을 맞아 일제 식민 지배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선포식이 거행됐습니다. https://tv.kakao.com/v/396083932 [뉴스투데이]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삼일절을 맞아 일제 식민 지배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선포식이 거행됐습니다. [철거선포 고유제(告由祭)]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선포하는 축제를 거행하게 되었음을 하늘과 땅에 고하나이다." 조선총독부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약탈하면서 1926년 건설됐습니다. 해방 후에도 수도 한복판에 버티고 서서 우리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고, 격론 끝에 결국 철거를 결정하게 됐습니다. [뉴스데스크/..
제6공화국 : 노태우정부(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방·개혁 노선이 맞물려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23층 타워룸에서 1시간 5분간 첫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한소 정상회담 합의가 최종순간 극적으로 이루어졌고 소측이 미소정상회담 종료 시까지 완벽한 보안을 요구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방·개혁 노선이 맞물려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23층 타워룸에서 1시간 5분간 이뤄진 첫 한소 정상회담에 한국 외무부는 당시 이런 평가를 문서에 남겼다. 외교부는 '태백산'이란 암호명 아래 두 달간 극비리 추진된 한소 정상회담 등이 담..
제6공화국 : 노태우정부(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한국현대사를 딱 한군데만 나눈다면 그것은 당연히 1987년일 것입니다. 그 이전, 즉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때까지는 (1960년 4‧19혁명 이후 짧은 민주화 시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독재시대'였고, 그 이후는 '민주화 시대'입니다. 이 같은 결정적인 분기점을 만든 것은 1987년 6월에 벌어진 6월 항쟁이고, 그 기폭제가 된 것이 바로 이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사건입니다.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이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뽑는 직선제 개헌을 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거세게 분출되던 1987년 1월 16일, 치안본부장은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 대학생 박종철의 죽음에 대해 이같..
1979년 10월 겨울공화국의 붕괴 : 박정희 대통령 피살 1961년, 4·19민주혁명의 열망을 짓밟고 등장한 박정희 군부정권은 유신헌법을 공포하며(1972년) 1인 영구독재 체제를 획책하였다.박정희 정권의 폭력적 억압 속에서 계속되던 민주화운동은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난관에 부딪친 독재 정권은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만찬회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79년 12월 유신잔재의 군사 쿠데타 : 신군부의 등장 최규하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0월 27일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전두환은 ..
제5공화국 : 전두환정부(1980년 8월 27일 ~ 1988년 2월 24일) 그날 밤 무슨 일 있었나…12·12사태 결정적 장면 6가지 1979년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 밀실에서 10.26사건이 일어난다. 그렇게 유신 체제는 1972년 유신 헌법 작업이 은밀히 진행됐던 그곳에서 처참하게 막을 내렸다. 사진은 10.26사건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비상 계엄 상태에서 중앙청 앞에 자리 잡은 탱크. 사진=연합뉴스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38년 전 오늘(12일)은 ‘12·12 사태’가 일어난 날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속해있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전두환이 정치적 실세로 자리를 굳힌 날이다. 전두환은 이후 김영삼 정권에서 전직 대통령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