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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윤관의 동북9성이 두만강 북쪽 中·러 국경지대에 있었다?2017. 5. 23. 11:02 이인철 경복대 교수, 고려 동북국경은 '두만강 이북'설 주장"윤관의 동북9성 최북단은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중·러 국경지대"[동아일보] 경복대 이인철 교수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과 현장 답사를 근거로 추정한 윤관의 동북9성 위치와 고려의 국경선.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제공. 고려의 명장 윤관이 세운 동북9성이 두만강 북쪽의 중·러 국경지대 부근에 있었다는 학술 주장이 처음으로 제기됐다.경복대학교 이인철 교수는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국경선으로 삼은 동북9성의 최북단이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둥닝(東寧)현 일대임을 관련 문헌과 현지 답사를 통해 밝혀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의..
고대 압록강은 어디인가?기자명오종홍 입력 2017.02.14 16:59수정 2017.03.13 12:16 고려시대까지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였다... 역사지리의 위치를 찾는 것은 역사연구의 핵심이다.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으로 작용하는 압록강은 언제 붙여진 이름일까?중국의 수많은 정사류正史類는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라고 한다.압록강이 요하라면 우리역사 다시써야... 중국의 '연산도燕山圖'라는 고지도를 보면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에 그려져 있다. 현재 압록강은 일제식민사관의 잔재... 압록강 위치를 바로 찾는 것은 중국 동북공정 무력화 시키는 길...서기2017.2.13. 서울 광화문한국통신(KT)건물에서 유라시안네트워크(이민화 대표)가 주최한 유라시안 역사인문학 특강에서 강원대학교 사학과 남의현 교수가 압..
고려 시대의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고려의 개혁을 위해 몸부림쳤던 한 왕이 있었다. 그 왕은 바로 고려의 제 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지속된 원(元)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自主性)을 되찾고자 노력했고,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지만) '신돈'(辛旽)이라는 인물을 중용해 정치, 사회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급진적인 개혁 노선을 펼치고자 했다. 고려 제 31대 왕 '공민왕'과 부인 '노국대장공주'. 국립고궁박물관 그러나 기성 세력들의 극심한 반발과 사랑하는 부인의 죽음, 대내외적인 반란 및 침입 등으로 결국 공민왕의 개혁은 좌초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고려의 마지막 '개혁혼'(魂)이 사그라졌고, 이후 고려는 돌이킬 수 없는 '망국'(亡國)의 길로 나아가게..
‘외계인 머리’를 한 유목민 전사의 비밀[책&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⑬ 편두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19-09-20 06:01편두는 범접할 수 없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욕망 표출한 풍습더 기묘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부를 세습하는 이 시대 특권층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미확인비행물체(UFO)를 타고 온 외계인을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는가? 보통 오징어 같은 연체동물이나 머리가 길쭉한 대머리 같은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까. 이제까지 외계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외계인으로 뾰족한 대머리 형태를 한 생명체를 떠올린다. 이런 이미지는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는 2천년 전 유라시아 초원에서 발흥한 유목민 흉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
100대 민족문화상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100대 민족문화상징 목록민족 상징 (2개)강역 및 자연 상징 (19개)역사 상징 (17개)사회 및 생활 상징 (34개)신앙 및 사고 상징 (9개)언어 및 예술 상징 (19개)민족 상징 (2개)1 태극기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이며 태극기 자체가 문화적 상징 직관물이다.2 무궁화무궁화는 대한민국의 국화이며 근역(槿域)이라는 용어에 역사적 함의를 담고 있다.강역 (6개)3 독도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영유권 분쟁 지역인 독도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야 하는 필요성이 거론되는 곳이다. 또한 한반도 해양 강역의 최고 상징이기도 하다.4 백두대간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뼈 역할을 하는 생태적 주축이다. 또한 한민족의 문화 경관을 형성한 ..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2월 유럽 주재 공관들에 훈령을 내린 사실이 2008년 2월 22일 밝혀졌습니다. 고종, 1905년 유럽 공관에 훈령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사진)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2월 유럽 주재 공관들에 훈령을 내린 사실이 22일 밝혀졌다. 고종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본지 2월 20일자 1면) ▶서구 열강의 정상에게 보낸 국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 밀사 파견에 앞서, 공식 외교 채널을 통해 입체적인 총력 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특히 고종은 이 훈령을 통해 주재국 정부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한편 전면 문호개방..
2012년 2월 22일 문화재청(청장 김 찬)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된 '사직단'(社稷壇:사적 제121호)의 원형복원을 위해 우선적으로 정비할 수 있는 시설물에 대해 자체적인 정비에 들어갔다고 밝혔습니다. 그 동안 서울특별시 종로구가 관리하던 사직단을 올해부터 문화재청이 이관 받아 현황 실태조사를 시행하고 원형복원을 위해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올 2월 말부터 자체 직영사업단을 투입, 주원(周垣:유원 주변을 다시 둘러싸고 있는 담)권역 양식에 맞지 않는 수목과 가로등 제거, 동파된 전(塼)돌 교체, 안향청 번와 보수, 덧달아낸 후면 창고 철거 등의 정비사업을 우선 시행하게 된다. 아울러 신성시 돼 있는 유원(壝垣:사단 등 제단을 둘러싸고 있는 담)과 주원 권역 안의..
■ 동북아 북방문명의 젖줄, 아무르 강줄기 따라 수많은 문화·유적 분포… 중류 ‘평저 융기문 토기’ 한반도서도 출토 아무르 강 유역 유적 분포도 나는 아무르 강을 보면 ‘아, 물이다’라는 말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모스크바에 유학할 때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로 ‘아무르’라는 명칭이 이주 한인들이 너무 힘들고 목이 마를 때 그 강물을 보고 “아, 물이다”라고 말한 연유로 생겨났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다. 아무르 강 하류의 니브흐인들은 그 강을 다-무르, 즉 큰 강이라고 불렀고, 더 하류 쪽의 에벤크(에벵키)인들은 이를 차용하여 아마르 혹은 아무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중에 러시아인들이 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아무르 강이 되었다. 아무르 강은 그 물 흐르는 것이 검은 용과 같다 하여 흑룡강이라 부르기도..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사신 저고여의 죽음으로 시작된 몽골의 침략, 고려는 결국 개경서 강화로 도읍을 옮기는(76) 고려·몽골의 전투와 강도정부 고려시대에 쌓은 강화산성 외성 남쪽. /강화군 제공 고려는 등거리 외교와 활발한 무역을 바탕으로 분열된 중국과 공존해왔다. 하지만 몽골의 등장으로 공존과 굴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정부는 강화로 천도했다. 고려의 강화 천도 사건은 다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고려 정부의 정통성 문제, 우리가 외세를 대하는 방식 등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고려와 몽골의 갈등은 1225년 사신으로 온 저고여의 죽음으로 시작됐다. 1231년 1차 침입이 있었다. 이후 몽골은 내정을 간섭하고, 압박을 가해 무신정권은 천도를 ..
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풍납토성 고고학적 발굴을 알아봅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2015년 7월 13일 풍납 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인지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이 있었습니다. 『‘서울 풍납 토성 백제왕성 심포지엄’에서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풍납 토성에 대한 첫 발굴조사가 1961년 이뤄진 이후 지속적인 발굴 작업 결과 풍납 토성이 백제 한성기(漢城期)의 도성이었다는데 학계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며 “풍납 토성은 인접한 몽촌토성과 함께 한성기 도읍 기간 중 도성을 구성하던 성이었다”고 말했다. 이희진 역사문화연구소장은 풍납토성이 백제의 평범한 성에 불과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우선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