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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조선의 강역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공험진부터 철령이 북계였습니다. 고려, 조선 및 중국 사료들이 말하는 고려의 북방강역. 지금의 요령성 진상둔진이 옛 철령이고, 흑룡강성 영안현이 공험진이다. 이케우치 히로시가 함경남도로 끌어내린 북방 강역을 100년째 추종하는 것이 이 나라의 부끄러운 현실이다.(출처;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 서울신문 (seoul.co.kr)) 태종은 재위 4년(1404) 5월 19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과 왕가인(王可仁)을 명나라 수도 남경에 보내 두 나라 사이의 공식적인 국경선 획정을 다시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명 태조 주원장이 “철령 때문에 왕국(고려)에서 말이 있다”면서 철령~공험진까..
미소띤 얼굴, 네모난 모자 “꼭 닮았다”…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 유물전동아일보업데이트 2015-11-25 03:00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김상운 기자 국립부여박물관-中 뤄양박물관충남 부여 정림사 터에서 발굴된 인물상(왼쪽 사진)과 중국 북위시대 영녕사에서 나온 인물상. 둘 다 농관(籠冠)을 쓴 모습이 닮았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후덕한 얼굴 위로 각이 진 네모난 모자가 서로 닮았다. 중국인들의 옛 복식으로 알려진 농관(籠冠)을 쓴 인물상이다. 하나는 중국 북위시대 영녕사(永寧寺), 나머지는 부여 정림사(定林寺) 터에서 나왔다. 영녕사는 6세기 초엽, 정림사는 6세기 중엽 이후 각각 건립됐다. 백제 사비시대의 왕실 사찰이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국립부여박물관은 중국 ..
한반도의 독자적 역사가 서기까지... 한반도 역사지리의 뿌리를 읽다 (daum.net)2024. 1. 14. [김성호의 독서만세 213] 박인호 지음 [김성호 기자]한때는 역사란 그저 외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의 하나쯤으로 여겼을 때였다. 그 시절 역사는 간명했다. 책에 쓰인 옛 이야기였고, 그 책이란 교과서였다. 교과서는 언제나 명확했다.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와 철기를 거쳐 여러 나라가 일어서고 쇠망했다. 그로부터 반도체를 팔아 지구 반대편에서 에너지를 사오고 K-Pop 스타를 배출해내는 이 작지만 강한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편 끝자락에서 고조선부터 삼한, 삼국시대가 이어졌고, 고려와 조선, 나아가 오늘에 이르는 역동적인 이야..
낙랑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낙랑국(樂浪國) 또는 최씨낙랑국(崔氏樂浪國)은 1세기경인 원삼국시대 때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비정되는 국가이다. 추정하는 위치나 이름으로 인해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과의 관계를 두고 논란이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최리라는 낙랑국 왕의 존재로 편의를 위해 최씨낙랑국이라고도 부른다.역사[편집]서기 14년, 신라가 왜의 침입을 받은 것을 기화로, 낙랑 역시 신라를 공격하였다.[1] 《삼국사기》에 따르면, 낙랑의 왕 최리(崔理)는 서기 30년 경에 옥저(沃沮) 지역으로 사냥을 나온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을 만나 사위로 삼았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간 후 최리의 딸(낙랑공주)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
허성관 [허성관의 忠言逆耳] 기대되는 공존과 번영의 신남북국 시대2018. 3. 10. 03:36우리 역사에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독립국이 존재했던 남북국 시대가 있었다. 신라와 발해(669~926), 고려와 요(遼ㆍ916~1129), 고려와 금(金ㆍ1115~1234), 조선과 청(淸ㆍ1616~1912)이 병립한 시기가 남북국 시대였다. 우리 역사를 이렇게 인식하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도 우리 역사 일부가 된다. 이는 필자가 처음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다. 유득공(1748~1809) 선생이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여 발해와 신라가 병립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했다. 김교헌(1868~1923), 박은식(1859~1925) 같은 선학들도 이미 주장한 내용이다. 이 두 분..
[코리안루트를 찾아서]에는 뉴허량(牛河梁) 13지점 좐산쯔(전산자·轉山子) 유적의 진쯔타(금자탑·金字塔·피라미드)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야동감과(冶銅감鍋), 즉 청동기를 주물한 흔적으로 보이는 토제 도가니의 잔편이 있는 층위를 발견했고, 청동주물을 떠서 옮기는 그릇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라고 합니다. 1986년 3월, 랴오닝성 진저우(금주·錦州)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꺾창(銅戈)이었다. 유물이 출토된 곳은 진셴(錦縣) 수이서우잉쯔(수수영자·水手營子) 마을이었다. 발해만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이며,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군사들이 죽어갔다는, 유명한 요택(遼澤)을 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동꺾창은 상나라 초기의 특징을 그대로 안고..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동명왕릉'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시의 력포구역 룡산리의 용산에 있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용산에 있었던 이 무덤이 '동명왕묘'로 전해졌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1891년 조선 고종 때 '동명왕릉'으로 추봉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동명왕릉이 동명성왕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기에 '전(傳) 동명왕릉'이라고도 합니다. 다만 적어도 근현대 이후 갑자기 생긴 게 아닌, 고려시대 때도 기록이 확인되는 정말 오래된 유적인 것은 확실합니다. (1)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옭기면서 졸본에 있던 동명왕의 무덤을 함께 옮겼다고 주장합니다.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졸본에 있..
김구 선생 잠든 '독립운동 성지'…용산구 효창공원[서울곳곳]양희동2024. 9. 25. 13:18의열사와 백범김구기념관 등 사적 제330호 지정이봉창·윤봉길·백정기 삼의사 묘역·안중근 의사 가묘김구 선생과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 등 묻혀소나무숲과 묘역 사이 산책로엔 주민들 많이 찾아 [글·사진=이데일리 양희동 기자] “어명이다. 김창수(김구 선생 본명)의 사형집행을 즉시 중단하라.”지난 24일 오후 2시 30분께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 정문에서 약 250m 떨어진 ‘백범 김구 기념관’ 입구로 들어서자, 1층 중앙홀에 김구 선생의 대형 좌상(座像)에 한눈에 들어왔다. 기념관 내부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일대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 활동, 백범일지, 가족 관련 자료, 서거 및 추모 관련 공간 등이..
광무개혁(光武改革)은 1897년부터 1904년까지 고종이 시행한 개혁을 말한다. 광무개혁은 대한제국을 서구화하고 근대하기 위한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대한제국은 산업 혁명의 후발주자로 참여하였다. 대한제국이 1897년 최초로 반포한 무게 및 측량에 관한 법에 따라 당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무게와 측량의 기준이 하나로 표준화되었다.[8] 같은 해 대한제국 정부는 지적조사를 개시하여 소유지 체계를 서구식으로 근대화하고자 했다. 이 개혁은 토지세 개혁과 연관이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화폐 제도의 개혁을 담당했던 이용익이 토지세 개혁을 맡았다. 지적조사를 실시한 이후 토지를 정확하게 측정한 지계가 발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토지 개혁은 러일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대한제국 정부는 도시의 산업기반시설도 갖추기 위해..
■ 만민공동회 관리(官)와 백성(民)이 머리를 맞대고 국가의 장래와 개혁의 방향을 논의한 것은 조선이 건국된 지 5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대신들과 시민들은 관민공동회에서 국정개혁안 '헌의6조'를 의결했습니다. 서희경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한국 역사상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의 이행의 역사는 1989년 만민공동회(관민공동회)로부터 시작된다면서 "이를 통해 백성이 비로소 정치적 주체로 떠오르고 자각되었으며 근대적 정치 주체인 '국민'이 탄생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관민공동회에서 의결된 '헌의6조'가 한국 근대 헌법의 뿌리가 됐다고 주장했습니다. 1898년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조선인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