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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4.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만주와 한반도의 후기 구석기시대에 여러 인골들이 발굴되었는데 아직 유전학적인 연구는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 한반도에서 돌로 만든 눈금자와 세계 최초의 그물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기 전인 2만 년 전의 간석기, 세계 최초의 볍씨 등이 발굴되었다. (출처; 주간경향, [특별기획]발해문명은 고대 동방의 중심이었다,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16553&code=116) (출처; 조빈복 저, 최무장 역, 중국 동북 구석기문화, 9쪽) 구석기 유적 분포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1. 5만 년 전 이전 4.1.1. 평안남도 덕천 승리산..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3. 현생인류 3.1 현생인류의 이동(아래 인용한 론문의 잉글리쉬 원문은 구글 번역을 바탕으로 번역하였음.) Stanyon et al.(2009)은 현생인류의 이동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동아시아로의 이주 날짜를 60,000년 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은 인류의 분산에 대한 세계적 시나리오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아프리카에서의 최초 이주와 인도 대륙 정착에 대한 가능한 가장 빠른 날짜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현생 인류 기원의 시간 추정은 에티오피아에서 고생물학적 발견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처럼 150,000년에서 200,000년 전 사이로 올라간다. 아프리카 밖으로 나온 뒤에 해안길을 따른 이주에 대한 대부분의 시기는 50,000년에서 77,000년..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2. 기후와 지형 2. 1 기후 후기 구석기시대(5만 년 전~1만 년 전)는 빙하기였다. 빙하기는 4만 년 또는 10만 년 주기로 지속되다 1만 년 또는 2만 년 주기로 간빙기가 있었고 마지막 빙하기는 약 11,500년 전에 끝났다고 한다. 25,000년 전부터 15,000년 전 사이가 가장 추워서 이때를 빙하기최고점(last glacial maximum, LGM)이라고 한다. LGM때 세계의 많은 지역은 춥고 건조하며 잦은 폭풍과 먼지가 많은 대기 상태였다. 먼지 수준은 현재보다 20배에서 25배까지 높았다.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빙하기의 추위를 특히 빙하기최고점 때 살던 사람들은 가장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것이다. 조천호 국립기상과학원장은 〈문명은 지..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1. 후기 구석기시대 강인욱은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문명은 구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2018.12.14.) 〉 라는 글에서 문명은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라고 하면서,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대형 신전인 1만 5000년 전에 만들어진 괴베클리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2만 년 전에 발견된 토기가 그 좋은 증거라고 제시하였다. 『[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②구석기시대 문명문명은 갑작스러운 발명품이 아니다. 후기 구석기시대 현생인류가 등장하면서 천천히 걸어온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마치 겨울에 뿌린 씨앗이 봄여름에 꽃을 피우듯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일구어낸 인간의 진화가 이어진 것이다. 터키 남부에서 발..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목차 1. 후기 구석기시대1. 1 세계의 후기 구석기시대1. 2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2. 기후와 지형2. 1 기후2. 2 지형2. 3 만주와 한반도의 지형 3. 현생인류3. 1 현생인류의 이동3. 2 만주와 한반도의 현생인류 4.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4. 1 5만 년 전 이전4. 1. 1 평안남도 덕천 승리산 동굴유적 - 덕천인4. 1. 2 평양 력포구역 대현동 동굴유적 - 력포인 4. 2 50,000년 전~40,000년 전4. 2. 1 평양 상원군 룡곡동굴유적(龍谷洞窟遺蹟) -룡곡인(49,000년 전~46,000 년 전)4. 2. 2 요녕성 해성시 소고산유적 -소고산인(40,000±3500 BP..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8 《태백일사》 〈고려국본기〉 고구려 왕족의 후손 궁예, 고려 태조 신성태왕(神聖太王), 16세 예종 문효대왕(文孝大王), 23세 고종 안효대왕(安孝大王, 25세 충렬왕 경효대왕(景孝大王), 28세 충혜왕 헌효대왕(獻孝大王), 31세 공민왕 경효대왕(敬孝大王), 32세 강릉왕 우왕의 기사와 서희장군, 윤관의 여진정벌, 윤언이, 이존비, 이암, 정지상 등의 기사가 실려 있다. 고구려 왕족의 후손 궁예 『태봉국(泰封國) 왕 궁예(弓裔)는 그 선조가 평양인으로 본래 보덕왕(報德王) 고안승의 먼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강(剛)이 술가의 말을 듣고 어머니 성을 따르게 하여 궁씨가 되었다.이보다 앞서 고구려 수림성 사람 모잠 대형이 유민을 모아 안승을 후고구려 왕으로 받..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7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대중상의 후고구려 건국 1세 세조 진국열황제(668년~699년), 연호는 중광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개화 27년(단기 3001년,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될 때 진국장군 대중상이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開原)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8,000명이었다. 함께 동쪽으로 돌아가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하고, 성벽을 굳게 쌓고 스스로 보전하여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을 중광(重光)이라 하셨다.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성에서 합류하는 자가 많았다.오로지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6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고구려는 황제국임을 보여주고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세 고주몽성제, 연호는 평락, 2세 유리명제, 3세 대무신열제, 6세 태조무열제, 연호는 융무, 10세 산상제, 11세 동천제, 19세 광개토경호태황, 연호는 영락,20세 장수홍제호태열제, 연호는 건흥, 21세 문자호태열제, 연호는 명치, 25세 평강상호태열제, 연호는 대덕, 26세 영양무원호태열제, 연호는 홍무, 27세 영류제, 28세 보장제, 연호는 개화 등 황제라 칭하였으며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타발, 소서노, 을파소, 을지문덕, 연개소문, 을밀이 나오고, 백제, 신라, 왜의 력사도 나온다. 고구려의 천도과정을 보면 고주몽성제가 평락 11년 갑오(단기 2307년, B..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5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신시시대 선인 발귀리, 복희씨가 지은 환역, 발귀리의 후손인 자부선생이 지은 《칠정운천도》와 배달의 《황부중경》, 《삼황내문경》, 《천부경》, 《삼일신고》, 발리가 지은 《신지비사》, 대부여 《구서지문》, 을파소 선생이 전하여 대대로 내려온 《참전계경》이 들어있다. 가륵단군(3세) 2년에 삼랑 을보륵이 지은 정음 38자 가림다도 나온다. 『신시시대에 선인 발귀리가 있었다. 대호와 동문수학하였는데 도를 통한 후에 방저와 풍산지역을 유람하며 자못 명성을 얻었다. 아사달에 와서 제천행사를 보고 예식이 끝난 후에 찬송하는 글을 지었다. 神市之世, 有仙人發貴理, 與大皞, 同門受學, 而道旣通遊觀乎方渚風山之間, 頗得聲華. 及觀阿斯達祭天, 禮畢..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4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2) 〈번한세가 상〉 치우천황께서 영토를 확장한 기사와 요 순이 단군조선의 제후였음을 알 수 있는 기사가 나온다. 『치우천황께서 서쪽으로 탁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를 평정하여 산을 헤치고 길을 내신 그 영토가 만 리였다. 단군왕검 때는 당 요와 같은 때인데 요의 덕이 갈수록 쇠하여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천왕께서 우순에게 명령하여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군사를 보내 주둔시키셨다. 우순과 함께 당요를 정벌할 것을 언약하시니 요임금이 힘에 굴복하고 순에게 의탁하여 목숨을 보존하고자 나라를 넘겨주었다. 이때 순 부자와 형제가 다시 돌아가 한 집안을 이루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