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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 1977년 고령 지산동 고분군 - 44호분, 45호분 발굴 1977년 11월 고령 지산동 고분 44호분과 45호분 발굴을 경북대와 계명대가 각각 맡았다.함께 답사에 나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66·고고학)는 “44호분 옆 공터에 베니어판으로 지은 가건물을 짓고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발굴을 했다”며 “1977년 겨울은 유독 추웠다”고 회고했다. 발굴한 지 39년 만에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앞에 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그의 등 뒤로 산 능선을 따라 대가야 고분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이 산에는 고분 70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령=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한반도 최다(最多) 순장묘 발굴 1977년 11월 시작된 44호분과 45호분 발굴은..
■ 김해 대성동 고분 “예전부터 ‘애꾸지’ 아이가.”1989년 7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온통 밭이던 야트막한 구릉 일대를 조사한 신경철 당시 경성대 교수(65·현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가 동네 토박이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애꾸지가 혹 ‘애기 구지봉’을 줄여 사투리로 부른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구지봉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탄생지. ‘그렇다면 애기 구지봉은 그의 후손인 역대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신경철 부산대 교수가 21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 29호 고분을 복원한 노출전시관에서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해=서영수 기자 kuki@donga.com“할배, 여기 옛날 이름이 뭡니까?” 이곳은 반경 500m 안에..
신채호 조선상고사열국의 분립삼신설이 파탄되어 삼한에 대한 믿음이 추락하니, 이것은 유사 이래 조선 최대의 위기가 되었다. 일부 인민들은 신인(神人)과 영웅의 허위성을 깨닫고 자치촌·자치계 같은 것을 설립했다.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일을 결정하고자 한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증거로는 진한부·변한부 같은 것이 있다. 이 외에도 역사책에 누락된 것들이 많을 것이다.하지만 미신을 타파하고 우주와 인생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등장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는 조선보다 문화가 저급한 예(濊)·선비·흉노·왜 같은 야만족들뿐이었다. 진보에 도움이 될 만한 벗들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은 장구한 문화를 보유했지만, 왕권을 옹호하는 사상과 학설밖에 없었으므로 중국의 문화를 수입한 것은 도리어 민중의 진보를 방해..
고구려 문화유산은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대한민국에 산재해있습니다.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애초 2000년경부터 유적의 세계유산 등록을 단독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므로 2003년에 등록될 예정이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북한(북조선)의 단독 등록에 반대하여 길림성(지린성)에 산재한 고구려 유적의 등록신청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적이 2004년 동시 등록이라는 형태로 등록되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에 산재한 고구려 유적은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무덤군(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이라는 이름으로, 북한(북조선)에 산재한 고구려 유적은 '고구려 고분군..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11)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의 청동기마을 입력 : 2008.08.29 17:34정선(아우라지) | 이기환 선임기자 흐르는 강물따라 문명이 어우러지다“무릇 나흘을 걸었는데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도다.”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1690~1756년)은 강원도 정선 땅을 걸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요즘에야 도로가 뻥 뚫려 있지만 예전에는 “산 첩첩 하늘 한 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두메산골이었다.아우라지 고인돌에서 청동기시대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이다. 서양인의 염기서열을 지닌 인골이라 해서 주목을 끌었지만, 아직은 정확한 분석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다. ■ ‘산 첩첩 하늘 한 뼘’ 이고 산 사람들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7월 어느 날. 기자는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이재..
-거대한 성, 수천년 전 韓민족을 증거하다- 10여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아(亞)자 형태인 주봉 유적만 해도 총 면적이 15만㎡나 된다. 주위에는 성벽 같은 반원형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있다. 찬찬히 뜯어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2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석관묘, 그리고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 많은 적석총과 석관묘….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 여섯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석축건물지만 무려 232개나 된다니…. # 청쯔산 정상에 선 나라는?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이며, 유적의 규모와 내용으로 보면 국가단..
신채호는 고조선에 삼경이 있었다고 하며 하나는 아스라, 즉 지금의 하얼빈, 또 하나는 아리티, 즉 지금의 개평현 동북에 있는 안시성 유적지, 또 다른 하나는 펴라, 즉 오늘날의 평양이라고 한다.(1) 리지린은 고조선 수도를 개평으로 보았다. 고조선 수도를 개평으로 인정하며 또 바로 그 부근에 《곰산》이 있다(성경통지 · 료동지). 이 《곰산》은 바로 《검산》으로 읽을 것이며 이것이 고조선 국가의 발생지로 인정된다. 거기에 정착한 고조선족은 이미 국가 형성 이전에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바 그 일부는 오늘의 중국 하북성 《예수》濊水 지역에까지 진출하였고, 또다른 일부는 압록강 이남으로 진출하여 거기의 원주민과 융합하여 《한족》韓族을 이루게 되였다고 인정된다.(2) 윤내현은 고조선이 처음으로 아사달阿..
신채호는 오늘날 봉천성의 서북과 동북(개원 이북과 흥경 이동)인 길림성·흑룡성 및 지금의 연해주 남쪽은 신조선의 소유였고, 요동반도(개원 이남과 흥경 이서)는 불조선의 소유였으며,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의 소유였다고 보았다.(1) 정인보는 한반도와 개원(開原) 이북, 흥경(興京) 이동으로, 길림(吉林)과 봉천(奉天)에서 흑룡강성(黑龍江省)에 이르는 지역을 거의 전부 영유하고 중국과 패권을 다투었다.(2) 리지린은 고조선 위치에 관한 사료를 가능한 정도로 수집하여 종합한 결과 기원전 3세기 초까지는 료동, 료서, 우북평에까지 이르렀고, 기원전 3세기 초에 서방의 광대한 령역을 연에게 탈취당한 결과 오늘의 대능하(패수) 이동 지역으로 축소되였다고 인정하였다.(3) 유 엠 부틴은 요동 지방의 ..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6. 남북국시대 6.21 2020년 4월 21일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직지'보다 138년 앞선 금속활자본…"국내 존재 사실 전혀 몰랐다"〉 이기환(경향신문 선임기자) 에 붙어있는 무신정권 실력자 최이(?~1249)의 발문. “기술자들을 모집해서 기해년(1239년) 주자본(금속활자본)을 거듭 인쇄한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는 ‘목판본으로 다시 새겼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최근 “속활자본으로 거듭 인쇄했다’고 해석하는게 옳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 1377년(우왕 3년) 찍어낸 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렇다면 문헌상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무엇일까. 혹은 등 2건으로 알려졌다. 의 경우 “(1234~1..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6. 남북국시대 6.15 2007년 11월 27일 매일경제 〈800년 전 출판강국으로 우뚝 섰던 고려〉 노원명 기자 『고려시대는 과학기술이 크게 흥했던 시기였다. 청자로 대표되는 고려의 도예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 도예는 기술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최첨단산업으로 오늘날 반도체 산업에 비견할 만하다. 청자 못지않게 세계 최첨단을 달린 기술이 바로 고려의 인쇄술이었다. 고려는 출판문화가 매우 발달한 나라였는데 일찍이 방대한 분량의 팔만대장경을 인쇄했다. 또 서양보다 무려 200여 년이나 앞선 1234년 역사상 최초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했다. 아쉽게도 이 책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